배움이란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것이다

실학산책

> 다산글방 > 실학산책

18세기 지식정보의 보고(寶庫), 『고금도서집성』

글쓴이 김문식 / 등록일 2006-06-07 09:16:45 / 조회수 923

- +

현대인들은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에 남보다 빨리 접근하는 것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정보에 민감한 것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은 중국에서 좋은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이를 구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는데,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하는 과정에서도 이를 알 수가 있다.


정조는 즉위한 직후에 사절단을 북경에 파견했다. 서호수(徐浩修, 1736~1799)는 부사의 자격으로 사절단에 포함되었는데, 정조는 특별히 그에게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입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청나라 정부가 『사고전서』를 편찬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현지에 도착한 사절단이 관련 정보를 수합해 본 결과 『사고전서』는 아직 인쇄가 완료되지 않았고 인쇄한 수량도 4건에 불과하여 구입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사절단은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사고전서』가 『고금도서집성』을 바탕으로 하여 그 규모를 확대한 것이므로 이번에 『고금도서집성』을 구입하고 『사고전서』는 후일의 형편을 보면서 구입하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절단은 숙소를 출입하던 서반을 통해 이 책을 구입했는데 대금으로 은 2,150냥이라는 거금을 지불했다.


새롭고 방대한 지식정보를 구하고자 아낌없는 노력


『고금도서집성』이 조선에 들어오자 정조는 책을 정리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우선 책을 조선식으로 다시 장정을 하고, 규장각 검서관이던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에게 책의 목차를 베끼게 했다. 『고금도서집성』은 6휘편, 32전, 6,109부로 구성되었는데, 네 사람이 목차를 쓰는 데만 40일이 걸렸다. 목차가 완성되자 정조는 책의 표지에 제목을 쓰게 했는데 당대의 명필이던 조윤형(曺允亨)에게는 책명을 쓰게 하고, 사자관들에게는 부의 제목을 쓰게 했다. 이 때문에 조윤형의 ‘도서집성(圖書集成)’ 네 글자는 유명해졌는데, 원래 명필이던 그가 5천 번 이상이나 쓴 글씨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들어온 『고금도서집성』은 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우선 책의 분량이 5천 책을 넘어 방대한 정보가 수록되어 있었다. 1781년에 규장각에는 총 3만 책의 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고금도서집성』 5천 책을 포함한 숫자였다. 또한 『고금도서집성』에는 지도, 산수, 금수, 초목, 기기의 모습을 자세하게 그린 그림이 있어 청의 지리와 문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이 책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책은 창덕궁 후원에 위치한 규장각 건물에 보관되어 규장각을 출입하는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서명응(徐命膺)은 책이 입수된 초기에 『고금도서집성』을 접할 수 있었다. 그는 정조의 스승으로 규장각의 설립을 주도했으며, 책을 구입해 온 서호수의 부친이기도 했다. 서명응은 세계지리서인 『위사』를 편찬하면서 이 책에 수록된 지리 정보를 인용했는데, 당시로서는 청에서 정리한 지리 정보가 가장 정확하고 충실하다고 판단했다.


정약용(丁若鏞)은 1790년 무렵에 가서야 『고금도서집성』을 보았다. 화성을 건설하던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면서 건설비용을 절감할 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는데, 이는 『고금도서집성』에 포함된 책이었다. 정약용은 『기기도설』에 나온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계를 제작했는데, 유명한 거중기가 바로 그것이다.


기계, 알파벳 등 서양의 지식정보도 가득


이규경(李圭景)은 서유구가 소장한 『기기도설』을 통해 서양인의 알파벳을 처음 보았다. 이 책의 저자인 테렌즈는 기계 그림에 알파벳 부호를 부여하고 기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했는데, 이 책을 본 사람이라면 알파벳을 접할 수 있었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서양인의 문자 20개의 모양을 소개하고 그 발음을 한자로 기입했는데, 이것만 익히면 온갖 소리를 기록할 수 있다고 했다.


『고금도서집성』은 조선 뿐 아니라 일본에도 전해졌다. 이덕무는 중국의 강남 상인이 일본에 『고금도서집성』 3건을 판매했는데, 한 건은 일본의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끼의 관청에, 두 건은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이던 에도(동경)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18세기에 동아시아 삼국에 전파된 『고금도서집성』의 방대한 정보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각국이 지식 정보를 수입하고 활용하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기에 18세기 문예부흥이 일어날 수 있었다.

 


글쓴이 / 김문식

· 단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 저서 : 『조선후기경학사상연구』, 일조각, 1996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문헌과해석사, 2000

           『조선 왕실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덧글 0
트위터 페이스북
이전글 대학생 실학순례 행사안내 및 참가신청
다음글 제2회 실학산책을 마치고
주소 : 04513 서울시 중구 서소문로 100 J빌딩 7층 TEL : 02-545-1692 FAX : 02-545-1694
Copyright(c) 2004 www.edasan.or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