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이란 잘못을 깨닫고 고치는 것이다

다산의 저서ㆍ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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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세유표
  • 목민심서
  • 흠흠신서
  • 6경4서 · 1표2서 · 시문잡저

    개관

    [요약]
    다산은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답게 정치·경제·역리·지리·문학·철학·의학·교육학·군사학·자연과학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방대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다산의 저술은 1922년에 문집에 넣기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집중본(集中本)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經學)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經世學書)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630권이다. 이 저술들은 대체로 6경4서 · 1표2서 · 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6경(六經 : 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 악경)

    먼저 6경에 대한 다산의 저작을 살펴보겠다.
    첫째 시에는 《모시강의》 12권외에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3권이 있다. 시는 간림(諫林)이라 하여 권선징악의 윤리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악사들로 하여금 조석으로 연주하게 하여 왕자가 그 선함을 듣고 감동하며, 그 악함을 듣고 깨우치게 하니 그 엄함이 춘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둘째, 서(書)에는 《매씨상서평(梅氏尙書平)》 9권, 《상서고훈(尙書古訓)》 6권, 《상서지원록(尙書知遠錄)》 7권이 있다. 《매씨상서》는 위서(僞書)로서 《사기》 양한서(兩漢書) 등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선기옥형(璿璣玉衡)》은 상천(上天)의 의기(儀器)가 아니요 《홍범구주(洪範九疇)》도 정전형(井田形)을 본뜬 정치이념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셋째, 예(禮)에는 《상례사전》 50권, 《상례외편》 12권, 《사례가식(四禮家式)》 9권이 있다. 관혼상제 등 사례 중에서도 상례에 치중한 까닭은, 천주교와의 상대적 입장에서 유교의 본령을 밝히려는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태뢰(太牢)·소뢰(少牢)·특생(特牲)·특돈(特豚)의 예에서 그의 변두나 궤형의 수에는 일정한 법도가 있다. 군왕·대부(大夫)·사(士)의 계급에 따라 차등이 있으므로 멋대로 증감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넷째, 악(樂)에는 《악서고존(樂書孤存)》 3권이 있다. 5성(聲) 6률(律)은 본래 같은 것이 아니다. 6률로써 제악(制樂)하므로 악가의 선천이요 5성으로써 분조(分調)하므로 악가의 후천이 되기 때문이다. 추연(鄒衍)·여불위(呂不韋)·유안(劉安) 등의 취률정성(吹律定聲)의 그릇된 학설을 따지는 한편 삼분손익(三分損益)·취처생자(娶妻生子)의 설이나 괘기월기(卦氣月氣)·정반변반(正半變半) 등의 설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섯째, 역(易)에는 《주역사전(周易四箋)》 24권, 《역학서언(易學緖言)》 12권이 있다. 역에는 4법이 있는데 추이(推移)·물상(物象)·효변(爻變)·호체(互體)로서 십이벽괘는 4시를 상징하고 중부(中孚)·소과(小過)두 괘는 오세재윤(五歲再閏)을 상징한다. 역에는 역수만 있고 순수는 없으므로 선천괘위(先天卦位)의 설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여섯째, 《춘추》에는 《춘추고징(春秋考徵)》 12권이 있다. 좌씨(左氏)의 책서(策書)는 춘추의 전이 아니요 그의 경의(經義)의 해석도 한나라 학자들이 저지른 지나친 잘못이다. 체는 오제(五帝)의 제사이다. 그런데 주례에서 체제를 말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이 오제를 제사지낸다고 한 것이 바로 체제이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도 상기(喪期)에는 변함이 없으므로 두예(杜預)의 설은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4서(四書 : 논어, 맹자, 대학, 중용)

    다음은 4서에 대한 다산의 저작을 살펴보겠다. 첫째, 《논어》에는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40권이 있다. 《논어》는 다른 경전에 비하여 이의(異義)가 너무나도 많다. 총 520여장 중 170여장의 이의를 하나로 묶어서 《원의총괄 原義總括》이라 하였다. 그 중의 한 예를 들자면, 효제가 곧 인(仁)이니 인이란 총체적으로 붙인 이름이요 효제란 분목(分目)으로서 주자의 심덕(心德)·애리(愛理)의 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둘째, 《맹자》에는 《맹자요의(孟子要義)》 9권이 있다. 성(性)이란 기호(嗜好)인데 형구(形軀)의 기호와 영지(靈知)의 기호가 있다고 한다. 본연지성(本然之性)은 본래 불가의 책에서 나왔으며 우리 유가의 천명지성(天命之性)과는 서로 빙탄(氷炭)과도 같아서 상호간에 비교할 길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 《중용》에는 《중용자잠(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6권이 있다. 용(庸)이란 항상 끊임없이 오래감을 의미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요 들리지 않는 것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곧 하늘의 모습이요 하늘의 소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넷째, 《대학》에는 《대학공의(大學公議)》 3권, 《희정당대학강의》 1권, 《소학보전(小學補箋)》 1권, 《심경밀험 心經密驗》 1권이 있다. 명덕이란 효·제·자(孝弟慈)삼덕으로서 사람의 영명(靈明)이 아니다. 격물(格物)의 물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이요 치지(致知)의 지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다.

    일표이서(一表二書)

    다음으로 1표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經世遺表)》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군현제도·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제·해세(海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牧民心書)》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봉공·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호·예·병·형·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欽欽新書)》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써 6경4서로써 수기하고 1표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시문잡저(詩文雜著)

    다음으로 시문잡저를 살펴보면, 시문집 18권을 간추려도 6권은 되고 잡문은 전편이 16권, 후편이 24편이다. 또한, 잡찬목록을 보면<아방비어고>30권(미완성)이 있고<아방강역고> 10권, <전례고> 2권 <대동수경> 2권, <소학주관> 3권, <아언각비> 3권 <마과회통> 12권, <의령> 1권 등이 있다.

  • 경세유표

    구성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은 필사본으로, 44권 1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제목은 《방례초본(邦禮草本)》이며, 1표(表) 2서(書)로 대표되는 경세론(經世論)을 펼친 저술 가운데 첫 번째 작품으로 일종의 제도개혁안이다. 전남 강진에 유배 중인 1817년(순조 17)에 저술하였으며, 처음에는 48권으로 지었으나 필사하는 과정에서 44권 15책으로 편집되었다.

    저술목적

    경세유표의 저작목적은,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라고 하여 오래된 조선이라는 나라를 통째로 개혁해 보겠다는 뜻이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내용

    《경세유표(經世遺表)》는 모두 4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새로운 국가경영을 이루기 위한 제도개혁론을 서술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을 살펴보면 천관수제[天官修制(吏曹)], 지관수제[地官修制(戶曹)], 춘관수제[春官修制(禮曹)], 하관수제[夏官修制(兵曹)], 추관[秋官(刑曹)] 그리고 동관[冬官(工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경세유표》는 추관(秋官)편과 동관(冬官)편이 결여(缺如) 된 미완성으로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은 그 후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보완되었다.

    《경세유표》의 제 1책(권1∼3)과 제 2책(권4∼6)은 천관이조(天官吏曺), 지관호조(地官戶曺), 춘관예조(春官禮曺), 하관병조(夏官兵曺), 추관형조(秋官刑曺), 동관공조(冬官工曺) 등 6조와 그 속아문의 구성 및 담당 업무를 서술하고, 각 조에서 관장해야 할 사회 및 경제 개혁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제 3책(권7-9)은 주로 이조의 업무에 대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다산은 관직체계, 관품체계의 조직과 운영 방법, 국토의 재구획안, 전국 지방제도의 재조정과 지방 행정 체계의 운영 방법 개선 및 관료의 인사 고과 제도 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 5책부터 제 14책까지는 호조의 업무에 관한 부분으로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에 대한 개혁방안을 주로 설명하였다. 먼저 제 5책(권12-14)과 제 6책(권15-17)은 정전제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정전법을 실질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제시하였다. 제 7책(권18-20)과 제 8책(권21-23)도 역시 정전제에 대해 서술한 부분으로서 특히 군사 제도의 정비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 9책(권24-26)은 정전제 실시를 위한 약전의 필요성과 방법을 설명하였다. 그 다음의 제 10책(권27-29)과 제 11책(권30-33)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방안이 제시되었다. 특히 국가의 조세가 오직 농민과 토지에만 집중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는 광업 . 공업 . 어업 . 상업 . 임업 등 모든 산업에 골고루 과세함으로서 국민의 부담을 줄이고 아울러 재정수입 증대도 꾀하였다.

    제 12책(권34-36)에서는 환곡제도의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사창제와 상평법을 시행하여 구휼사업이 실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배려하였다. 이어 제 13책(권37-38)에도 부세제도의 개선방안이 수록되었는데, 특히 여기에서는 어업과 염전 등에 부과되는 세금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제 14책(권39-41)은 호적법과 교민지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는 호적을 정비하여 국민을 정확하게 파악하며 인재를 뽑아 교육시키는 정책 등이 제시되었다.

    제 15책(권42-44)에는 주로 문과와 무과의 과거제도 개혁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경세유표》에 집약된 다산의 개혁 사상은 결국 그의 경학론과 정치경제론의 종합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책은 《목민심서》나 《흠흠신서》가 당시의 사회나 법률체계를 크게 변화시키지 않은 채 지방행정이나 형사사건 등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상세하고 세부적인 실무 지침을 규정하고 있는 것과는 크게 달랐다. 이들과 달리 《경세유표》는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 원칙을 보다 근본적으로 제시된 저술이다. 관직 체계의 전면적 개편, 신분과 지역에 따른 차별을 배제한 인재등용, 자원에 대한 국가관리제 실시, 토지개혁과 부세제도의 합리화, 지방 행정조직의 재편 등 다산이 이 책을 통해 제기하고 있는 개혁안들은 바로 근본적인 개혁이 이뤄져야만 가능한 것들이었다.

    또한 이 책에는 남인 실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인 토지개혁 사상 뿐 아니라 기술과 상공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 실현이란 북학파들의 주장까지 폭넓게 담겨져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야말로 다산의 사회경제적 이념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려 한 이상사회을 밝혀내는 지침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책은 당시 사회의 실상과 온갖 모순을 비판적 안목에서 상세히 서술하여 조선 후기의 사회 및 경제 연구에 무엇보다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목민심서

    구성

    48권 1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정부기구의 제도적(制度的) 개혁론을 편 것이라면, 이 책은 지방 관헌의 윤리적(倫理的) 각성과 농민경제의 정상화 문제를 다룬 것이다. 이 책은 다산이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것으로,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자료를 뽑아 수록하여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코자 한 것이다. 내용은 모두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모두 72조로 엮었다.

    ① 부임편(赴任篇):제배(除拜) ·치장(治裝) ·사조(辭朝) ·계행(啓行) ·상관(上官) ·위사(?事)
    ② 율기편(律己篇):칙궁(飭躬) ·청심(淸心) ·제가(齊家) ·병객(屛客) ·절용(節用) ·낙시(樂施)
    ③ 봉공편(奉公篇):선화(宣化) ·수법(守法) ·예제(禮祭) ·문보(文報) ·공납(貢納) ·요역(?役)
    ④ 애민편(愛民篇):양로(養老) ·자유(慈幼) ·진궁(振窮) ·애상(哀喪) ·관질(寬疾) ·구재(救災)
    ⑤ 이전편(吏典篇):속리(束吏) ·어중(馭衆) ·용인(用人) ·거현(擧賢) ·찰물(察物) ·고공(考功)
    ⑥ 호전편(戶典篇):전정(田政) ·세법(稅法) ·곡부(穀簿) ·호적(戶籍) ·평부(平賦) ·권농(勸農)
    ⑦ 예전편(禮典篇):제사(祭祀) ·빈객(賓客) ·교민(敎民) ·흥학(興學) ·변등(辨等) ·과예(課藝)
    ⑧ 병전편(兵典篇):첨정(簽丁) ·연졸(練卒) ·수병(修兵) ·권무(勸武) ·응변(應變) ·어구(禦寇)
    ⑨ 형전편(刑典篇):청송(聽訟) ·단옥(斷獄) ·신형(愼刑) ·휼수(恤囚) ·금포(禁暴) ·제해(除害)
    ⑩ 공전편(工典篇):산림(山林) ·천택(川澤) ·선해(繕?) ·수성(修城) ·도로(道路) ·장작(匠作)
    ⑪ 진황편(賑荒篇):비자(備資) ·권분(勸分) ·규모(規模) ·설시(設施) ·보력(補力) ·준사(竣事)
    ⑫ 해관편(解官篇):체대(遞代) ·귀장(歸裝) ·원류(願留) ·걸유(乞宥) ·은졸(隱卒) ·유애(遺愛)

    저작목적

    목민심서의 저작목적은 “현행의 법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살려내보자”(因今之法而牧吾民也)라고 하여 법과 제도를 고치고 바꾸지 못한다면 공직자들이 마음과 몸을 제대로 수양하여 청렴한 생활을 하면 세상이 바르게 되고 백성들이 숨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실제 행정에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펴서 아사지경의 인민들을 살려내자는 의도였다.

    내용

    목민관 곧 고을 수령이 지켜야할 지침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술로, 고을 수령이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과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쳐 저술하고 있다.
    지방수령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가서 본 것과 암행어사 곡산부사 등을 지내면서 백성들의 고된 삶을 목격했던 다산의 생생한 체험이 녹아 들어있으며 조선후기 지방사회의 부패상과 인생문제가 소상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이는 수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백성의 편에서 수령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형식으로 기술되고 있어 다산의 애민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조선후기 지방행정의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책으로 다산이 돌아간 뒤 수많은 필사본이 유통될 정도로 널리 읽혀졌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교양인들이 찾고 있는 우리시대의 고전적인 경전이다.

  • 흠흠신서

    구성

    3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22년(순조 22)에 간행되었다. 형옥의 일은 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이지만, 이를 가볍게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 임무를 맡은 관리들이 유의할 점을 적은 것이다.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평전초(批評雋抄)》 5권, 《의률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祥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나누고 각각 실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저작목적

    《흠흠신서》의 저작 목적은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했다. 형사사건에서 재판관이 제대로 법을 집행하지 못하거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못해 수 없이 많은 억울한 자가 나오게 된다면서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한 저술을 남겼다.

    내용

    이 책은 중국의 대명률과 조선의 경국대전에 나타난 형벌의 기본원리와 이념을 요약 논술하였으며, 살인사건 등 중요한 사건의 판례를 뽑아 설명하였다. 특히 살인사건 조서를 작성하는 수령에게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살인사건 문서의 틀과 문장기법, 사실인정 기술 등을 상세히 소개하였다. 그러면서도 판결에 있어서는 신중함과 관용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그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다.

    〈경사요의〉에서는 중국의 유교경전에 나타난 형정(刑政)의 기본이념을 밝히고, 중국과 조선의 역사책에 나타난 저명한 형사판례를 뽑아서 고금의 변천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함으로써 목민관(牧民官)이 참고하도록 했다. 여기에서는 중국의 판례 79건, 조선의 판례 36건을 소개했다. 여기에서 저자는 법률을 변통 없이 고수만 해서는 안 되며 의(義)에 비추어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승인하고 있으나, 하찮은 연민의 정은 경계했다.

    〈비상전초〉는 조선의 판결문인 제사(題辭)나 재판관계 왕복문서인 첩보(牒報)가 법률식 문장을 사용하지 않고 장황하거나 잡스러운 폐단을 시정하기 위하여, 중국의 재판문서 가운데 모범적인 판례를 뽑아 제시하고 해설과 비평을 붙인 것이다.

    〈의율차례〉는 살인사건의 유형과 그에 따르는 적용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구별되지 않음을 고치기 위해 중국의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해놓았다.

    〈상형추의〉는 무원(無寃)·무의(無疑)한 재판에 참고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정조의 인명사건에 관한 판결을 모은 〈상형고 祥刑考〉를 자료로 하여 엮은 책이다. 〈상형고〉 가운데 144건을 골라서 정범(正犯)과 종범(從犯), 자살과 타살, 상해치사와 병사(病死), 고의와 과실 등 21개 항목으로 분류하고, 최종판결의 당부(當否)에 대하여 논평했다.

    〈전발무사〉는 저자가 곡산부사(谷山府使)·형조참의 등으로 재직하던 중에 관여한 인명관계 판결과 유배중에 보고 들은 인명에 관한 옥안(獄案)·제사(題辭)·검안발사(檢案跋辭)로서 의심가는 것 17건을 모아서 분류하고 평한 것이다. 이 책은 정약용의 많은 저술 가운데서도 〈목민심서〉·〈경세유표〉와 함께 1표2서로 불리는 중요한 저술로서 1961년 문헌편찬위원회에서 영인본으로 간행한 《정다산전서(丁茶山全書)》 하권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자찬묘지명

    다산은 1818년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하며 말년을 보낸다. 61세 때에는 회갑을 맞아 다산 자신이 직접〈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자찬묘지명〉은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이고, 다른 하나는 무덤 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이다. 여기서는 다산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집중본)의 원문과 국역(박석무 역)을 소개한다.

  • 아학편

    이 책은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라고도 부르는 책으로, 다산선생이 43세이던 1804년 봄에 귀양살이 하던 전라도 강진읍에서 편저한 책이다.

    당시 아동교육용 책으로는 《천자문(千字文)》이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다산선생은 그 《천자문》이 아동용 교과서로 적절하지 못함을 설파하고, 그 대안으로 아동들이 생활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사물(事物)을 중심으로 하여 2000자의 글자를 골라 상권과 하권으로 나누어 각각 천자씩으로 《아학편》을 편성하였다. 이는 다산의 실사구시적 자세를 보여주는 일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다산은 자신이 편찬한 책으로 당시의 아동들을 가르쳤으며, 다산의 제자들도 후손들에게 그 책으로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이 책은 조선왕조 말엽인 광무(光武) 연간에 지석영(池錫永)선생이 글자마다 한글, 일본어, 영어로 훈독을 달아 아동용 학습서로 간행하기도 했다.

    이 《아학편》은 다산이 생존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알아야할 한자였지만, 근래에 상용한자가 1,800자로 한정되면서 지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글자도 상당수 있다. 이 책으로 아동들을 가르치려면 우선 당시의 한글이 지금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훈독을 현대어로 바꾸어야 하고, 상용한자가 아닌 것은 삭제하고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개관

안내
1. 이 방에서는 다산 정약용에 관해 처음 관심을 갖는 분이나 이제 막 다산공부를 시작하는 초학자를 위해 입문수준의 내용을 마련했습니다.
2. 다산사상에 관해 본격적으로 학습을 하실 분은 자료실의 연구논문과 연구저작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3. 다산의 저작 목록을 참조하셔서 다산의 저작(원전 또는 국역)을 직접 탐독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의 인격수양으로 시작하는 학문

다산의 학문은 경학(經學)에서 출발한다.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찬묘지명>에 “육경(六經)사서(四書)로써 자신의 심신을 수양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써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니, 이로써 본(本)과 말(末)을 갖추었다”고 적고 있다.

다산의 학문체계는 경학을 근본으로 하고, 경세학을 그 실현방법으로 보고 있다. 경학을 통해 수기(修己), 즉 자기의 인간됨의 완성을 위해 수양하고, 경세학으로 치인(治人), 즉 완성된 인격과 능력으로 천하와 국가를 경영(세상에 봉사)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배시절 초기에 경학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에 들어갔다.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주자 성리학 비판,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

다산은 『오학론』에서 성리학,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의 다섯가지 학에 관해서 그 폐단을 비판했다. 다산은 당시의 지배적인 학문이던 주자성리학에 안주하지 않았다. 관념화된 주자성리학은 더 이상 시대를 이끌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공자와 맹자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이는 결코 복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양의 혁명적 사상은 당시의 지배이념에 대한 비판으로 그 근거를 고대의 전통에서 찾곤 했다. 다산의 개혁론도 전통에 내재된 본래적 가치를 재각성함으로써 현재의 묵은 폐단을 제거하는 논리를 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다산정신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이론 위주의 성리철학으로 윤색된 육경(六經)과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새롭게 재해석하여 공자, 맹자의 본지(本旨)가 무엇인가를 해명하는 데에 힘썼다. 그 결과가 《논어고금주》48권을 비롯하여 《맹자요의》 9권 등 육경?사서에 대한 232권의 방대한 저술로 남았다.

여기서 다산은 성(性) · 인(仁) · 도(道) · 덕(德) · 명(命) 등 대부분의 유교의 중심적인 명제(命題)들을 다시 해석한다. 이(理)라는 관념의 세계로 해석한 주자와 달리, 실행과 실천이 가능한 실학적 사고로 새로운 경전 해석을 시도한 것이 다산의 경학이었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학문

다산은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학문자세를 견지했다. 청나라에서 새롭게 전래된 경전해석 방법인 고증학이나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 등 새로운 사조에 열려있었다. 그리고 고증학의 실증적 태도 등 객관적 학문자세를 따르지만 그에 머물지 않았다. 실증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지 않고 실용이라는 목적을 추구했다.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다산은 속유론(俗儒論)에서 ‘속된 선비는 시의(時宜)를 모르니 어찌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에 대해 논하면서, 고루한 선비의 잘못을 질타했다.

“참 선비의 학문은, 본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며, 외적을 물리치고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며, 문(文)에 능하고 무(武)에 능한 것, 이 모두 해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찌 옛 사람의 글귀나 따서 글을 짓고, 벌레나 물고기 등류의 해설을 하고, 소매 넓은 선비 옷을 입고서 예모(禮貌)를 익히는 것만이 선비의 학문이겠는가.”

경세학(經世學),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경세학(經世學),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사상

경학과 더불어 다산의 중심과제인 경세학은 당시 사회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세상은 썩고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는 것이 다산의 진단이었다.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一毛一髮無非病耳)”고 보았으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며 개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정약용이 쓴 자찬묘지명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경세유표』를 지은 동기는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할(新我之舊邦)’ 생각이라 했다. 나라를 완전히 개혁하여 새로운 체제로 바꾸려는 의사로 경세유표를 저작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다산은 숱한 개혁안을 내놓았다.

민(民)이 근본이다

다산 경세학의 근저에는 민(民)을 근본으로 여기는 자세 또는 민(民)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 다산이 남긴 시문들은 당시 민초의 피폐하고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경기 암행어사로 민간에 잠행하면서 농촌의 피폐상을 직접 보고서, 강진 귀양살이 때 국가권력과 아전의 횡포를 직접 듣고서 토해낸 글들이다.

다산은 당시의 치자-피치자의 구조에서 백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치자의 책무와 피치자의 권리를 각성시키고자 노력했다.

원목(原牧)이라는 글에서 “목민관이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관을 위해 생긴 것인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하여 “목민관이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牧爲民有也)”고 결말을 짓고 있다.

또한 탕론(湯論)에서는 “탕왕(湯王)이 걸(桀)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라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천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해서 만들어진 것이다(天子者 衆推之而成者也)”고 답한다. 그리하여 “옛날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했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는 것이 순(順)이라”고 보았다.

다산은 목민심서 서문에서 군자의 학문은 수신(修身)이 그 절반이요, 나머지 절반은 목민(牧民 : 백성 다스리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목민관으로서 요구되는 덕목으로 ‘율기(律己: 자신을 다스림)’, 봉공(奉公: 공을 받듦), ‘애민(愛民: 백성을 사랑함)’ 세 가지를 벼리로 삼고 있다. 이 모두가 백성 한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입었으면 하는 것이 다산의 마음이었다.

『흠흠신서』를 지은 것도 법의 집행에서 억울한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다산의 애민정신, 민본사상은 민생을 위한 각종 대책으로 연결된다. 경자유전(耕者有田), 균산병활 원칙에 입각한 토지제도 조세제도의 개혁론을 전개했다. 나아가 제도개혁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생산증대의 방법을 모색한다. 기계와 기술의 도입에 의한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기술을 개발하여 백성을 편하고 넉넉하게

다산은 그의 「기예론(技藝論)」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널리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했다. “사람이 많이 모일수록 그 기예가 정교하게 되고, 세대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그 기예가 더욱 공교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더 넓은 세계의 기예를 배울 것과 새로운 기예를 배우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의 기예나 직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편리함을 도모하고 소득을 올릴 수 있고, 병기의 기예를 정교하게 하여 용맹을 돕고 그 위태로움을 보호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그 밖에도 의술과 백공의 기예가 정교해지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군대가 강해지고 백성들이 넉넉하여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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